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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와 힐라 베허 (Bernd & Hilla Becher 1931~2007)

  • 작성자 사진: Sangwon Jung
    Sangwon Jung
  • 13시간 전
  • 3분 분량

베른트와 힐라 베허
베른트와 힐라 베허

얼핏 보면 공학 잡지나 지리 부도의 한 페이지처럼 보이는 이 독특한 사진들.

놀랍게도 이 사진들은 현대 미술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1990년 세계 최고 권위의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에서 사진이 아닌 '조각 부문 황금사자상(Golden Lion for Sculpture)'을 수상하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카메라를 들고 사라져가는 산업 시대의 유산을 기록하며 '사진을 조각의 지위'로 격상시킨 위대한 독일의 부부 사진가, 베른트와 힐라 베허(Bernd & Hilla Becher)의 예술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겠습니다.


1. 운명적인 만남과 '유형학(Typology)'의 시작

남편 베른트 베허(Bernd Becher, 1931~2007)는 원래 회화와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던 청년이었고, 아내 힐라 베허(Hilla Becher, 1934~2015)는 상업 사진작가로서 철저히 훈련받은 기술자였습니다.

1957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적 감각과 기술적 집요함에 이끌려 1959년부터 공동 작업을 시작했고, 1961년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향한 곳은 세련된 도시나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유럽과 북미 전역에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철거되어 가던 광산, 제철소, 급수탑, 사일로(곡물 창고), 가스 탱크 같은 거대한 '산업 건축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 거대하고 삭막한 문명의 잔해들을 마치 식물학자가 새로운 꽃을 채집하여 분류하듯, 아주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사진사에서는 '유형학적 사진(Typology)'이라고 부릅니다.


2.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베허 부부만의 엄격한 촬영 공식'

베허 부부의 사진은 얼핏 보면 누가 찍어도 똑같을 것 같은 '냉정함'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 차가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부는 자신들만의 극도로 까다롭고 엄격한 '5가지 촬영 공식'을 세우고 이를 평생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 첫째, 먹구름이 낀 흐린 날(Overcast Sky)에만 촬영한다.

    • 강한 햇빛이 만들어내는 짙은 그림자는 건축물 고유의 형태를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빛이 사방으로 균일하게 퍼지는 부드러운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피사체의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만 온전히 드러나게 했습니다.

  • 둘째, 완벽한 정면, 혹은 정중앙 구도를 고집한다.

    •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극적인 연출을 배제하기 위해, 카메라는 늘 피사체의 한가운데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떠한 앵글의 왜곡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셋째, 거대한 8x10 대형 뷰 카메라를 사용한다.

    • 건축물의 아주 미세한 볼트와 철판의 질감 하나까지도 칼날처럼 선명하게(Crisp) 기록하기 위해 무겁고 느린 대형 카메라만을 고집했습니다.

  • 넷째, 사진 속에 '사람'을 절대 넣지 않는다.

    •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의 시선이 분산되고 감정적인 서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하학적 구조물만이 프레임을 지배하게 했습니다.

  • 다섯째, 격자무늬(Grid) 구조로 배치하여 전시한다.

    • 사진 한 장을 단독으로 보여주는 대신, 비슷한 형태의 급수탑이나 가스 탱크 사진 9장, 혹은 12장을 가로세로 바둑판 모양으로 나란히 배치했습니다. 관객들이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구조의 미세한 차이와 반복적인 패턴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3. "익명의 조각들" : 사진이 조각이 된 마법 같은 순간

"우리는 이 거대한 산업 구조물들을 설계한 엔지니어들의 숨겨진 예술적 의도를 포착합니다. 이 건축물들은 기능에 지배받아 만들어진, 우리 시대의 '익명의 조각들'입니다." - 베른트 & 힐라 베허

베허 부부는 자신들의 첫 번째 사진집 제목을 <익명의 조각들(Anonymous Sculptures, 1970)>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들이 포착한 급수탑과 제철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변기통을 미술관에 가져다 놓아 예술로 만든 것)처럼, 현실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거대한 예술적 조각상이었던 것이죠.

이 개념을 전 세계 예술계가 인정한 결정적인 순간이 바로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였습니다.

평론가들은 베허 부부의 사진이 단순히 평면 이미지를 기록한 것을 넘어, '3차원의 조각적 부피감과 기하학적 형태미'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다고 극찬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사진작가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의 '조각 부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는 역사적인 아이러니이자 위대한 승리를 기록하게 됩니다.


4. 현대 사진의 전설이 된 '뒤셀도르프 학파(Düsseldorf School)'의 탄생

베허 부부의 영향력은 자신들의 작업에서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6년부터 베른트 베허는 모교인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의 초대 사진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의 철저하고 냉정한 예술적 사조와 가르침 밑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훗날 전 세계 현대 미술 시장을 장악하는 거장들이 됩니다.

  •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사진 중 하나인 <라인강 II>를 찍은 거장

  •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 미술관 속 관람객들의 뒷모습을 정밀하게 포착해 내는 작가

  • 토마스 루프(Thomas Ruff): 차가운 무표정의 대형 포트레이트로 사진의 개념을 넓힌 작가

  •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대칭미가 돋보이는 웅장하고 고요한 도서관과 박물관을 담는 작가


이들을 가리켜 오늘날 미술사에서는 '베허 학파(Becher School)' 혹은 '뒤셀도르프 사진학파'라고 부릅니다. 이 학파의 탄생 덕분에 현대 사진은 한낱 취미나 기록용 도구에서 완전히 벗어나,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현대 개념 미술의 가장 강력한 핵심 매체로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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